2024. 8. 25. 18:35ㆍ리뷰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주연 :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히스 레저, 게리 올드만, 에런 엑하트, 매기 질렌할, 모건 프리먼
처음 배트맨 영화에서 철학을 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배트맨 초창기 잭 니콜슨이 조커로 나왔을 때 했던 대사 때문이었다. 조커가 어느 미술관에 들러 물품을 훔치는데, 부하들이 미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자, 어느 그림을 보고서는 그만두라고 말한다. 그 그림을 보고“정말 멋있군,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정도 되는 대사를 내뱉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그림은 다시 찾아보니 프란시스 베이컨의 “고깃덩어리와 인물(1954)”이었다. 조커의 캐릭터는 “공포에서 고함으로, 고함에서 미소로“ 나타낼 수 있는 피학을 상징한다. 그는 기존의 구조, 질서를 거부하고 그 구조를 오히려 뛰어넘는데, 다크나이트에서는 모든 시민을 자기에게 복종하라 명하고, 선한 사람의 상징이었던 하비덴트를 악인으로 만들고, 공포를 이용하여 시민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고자 한다. 결국 모든 코드를 한데 뒤섞어 버리는 것을 이념으로 하는, 정신분석학과 공모하여 착취를 심화시키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존재 방식, 즉 정신분열증 개념을 확충하기 위해 동원된 탈영토화란 개념에 가까운 캐릭터를 악인으로 주로 설정한다. 그런 악인들에게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에 대한 오마쥬일까, 히스레저가 분한 다크나이트 조커는 배트맨 분장을 한 가짜 배트맨을 살해하여 시청 앞에 매달아 놓고 테이프를 같이 보낸다. 그 테이프엔 살해 직전 가짜 배트맨과의 대화하며 ”나는 가짜이지만 정의를 위해 맞선다“는 가짜 배트맨의 말을 조롱하며 그를 농락하는데, 그 장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가짜 배트맨 뒤로 정육점의 고깃덩어리가 보이는데, 마치 ”고깃덩어리와 인물(1954)“를 연상케 한다.
배트맨은 단순히 박쥐란 동물을 모방하여 표상적, 재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박쥐란 동물-되기를 통하여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감응을 생성하고 그 힘과 속도를 주인공의 신체에 부여하여, 그런 힘과 속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강렬도를 생성해낸다. 이런 강렬도는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과 평범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행위들에 대한 거부,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악인들은 현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조커는 다크나이트에서 시장, 경찰청장, 정의의 백기사로 떠오른 검사 몇몇을 살해하고, 정의의 무법자, 선의의 무법자인 배트맨에게 올가미를 뒤집어 씌운다. 그의 얼굴이 공개되면 나의 폭력은 멈출 것이다. 정의에 상징을 평범한 무법자로 이접시킴으로써 단순히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어 이른바 아나키즘에 대한 속내를 거리낌 없이 내비친다. 배트맨은 악인에 대한 대항으로써 강렬도를 가지고 있다. 배트맨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것도 아니고 등에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따금 박쥐와 인간은 서로 촉발되고 변용되면서 새로운 관계를 구성해 내기도 한다. 주인공이 위험에 빠졌을 때 박쥐가 나타나서 그를 구원해 주기도 하는데, 단순히 박쥐를 모방하는 히어로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허무개그에 지나지 않는다.
브루스웨인은 어렸을 적 부모님과 연극을 보러 갔다가 너무 지루해 집으로 가자고 조른다. 그리고 집으로 가려고 극단 뒷문을 나서는 순간 강도들이 나타나 그의 부모님을 살해하는데, 이때부터 배트맨은 죄의식, 공포, 분노에 고통스러워한다. 악인에 대한 복수와 명예를 지키라던 부모님의 말씀 사이에 고민하게 된다. 이른바 양자택일은 일종의 정신적 선택이다. ‘언제나 모든 문제는 예외가 있다’는 일반론이 팽배한 현실에서 양자택일은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되기 쉽지만, 이른바 더 고차원적인 상태를 드러내기에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키르케고르의 개념을 빌리는데,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인생은 3단계로 나뉜다. 1단계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일종의 향락적인 개념이라면 2단계는 무절제한 절망을 한탄하는‘도덕적 경지’에 이른다.
이런 선택의 문제는 2단계에 이르러 윤리적인 문제로 변하는데, 정신적 양자택일은 이 전부를 포괄하는, 즉 적어도 2단계에 이른 자를 위한 개념이다. 도덕적 필연성과 심리적 필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신적 양자택일은 ‘선택과 비 선택’마저 선택하게 만드는 넓은 개념인데, 이는 ‘선택’을 하는 인간은 ‘비 선택’하는 개념마저 갖고 있을 것을 상정하고 있기에 어떤 이가 양자택일의 순간에 있다면, 이미 그는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배트맨은 자기 개인의 복수와 명예 사이에서 갈등하며, 사회악에 대한 태도에서 그는 선택하고 있다. 그는 무자비한 악당을 단순히 죽일 기회를 가지지만 여지없이 죽이지 않고 생포하여 경찰에 넘긴다. 우선 경직된 몰적 선분성이 있다. ‘몰적’이란 말은 분자적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통계 법칙에 따라 기능하고 정확한 미세함, 차이, 특이성의 효과를 버리는 경직된 침전화를 나타낼 때 쓰는 용어이다. 배트맨에서는 경찰집단이 바로 그러한 개념이다. 경찰이 범죄자를 잡으려 할 때 배트맨이 나타나면 그들과 배트맨은 선을 긋는다. 평균에서 벗어난 움직임, 고유성, 외부의 것을 배척하는 것은 몰적 선분성을 나타낸다. 이에 배트맨은 회의를 느끼고 나는 나 너는 너, 즉 고유의 움직임을 갖게 된다. 나는 ‘사람 구하는 영웅’ ‘정의의 심판자’ 같은 목표를 가지고 행동한다. 몰적 선분 내에서는 장래는 있지만 창조와 진보는 없다.
또한 몰적/분자적이라는 이 개념쌍은 변증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움직임의 방향과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몰적인 방향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생성된 것을 특정하게 코드화할 뿐이다. 이에 반해 분자적이라는 개념은 미세한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세한 흐름은 반드시 작은 제도나 장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인 분자적 움직임도 가능하다. 따라서 미시구조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구조 및 제도 속에서 흐르는 미시적 흐름을 중시한다. 이러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배트맨이 계속하여 경찰과 충돌하는 것은 경찰집단과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경찰이 범인을 잡으려 한다면, 실적과 승진을 통한 현대사회의 구조, 몰적성을 나타낸다. 몰적성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경찰과 배트맨이 범죄앞에서 대립하는 구조, 또한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히 배트맨을 거리의 무법자, 말썽꾸러기로 전락시켜 대립하는 광경은 몰적선분과 그것을 거부하는 이질적인 투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배트맨은 일종의 전쟁기계로 볼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이라는 개념은 니체적인 개념 ‘아곤’과 가깝다. 그리스의 정치를 ‘아곤’이라고 부른다면 적대적인 관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쟁은 ‘안타곤’의 개념이다. ‘안타곤’에 따른 전쟁은 상대를 복종시키고 굴복시키며, 적을 파괴한다. 그러나 아곤이란 서로 경쟁하며 힘을 키우고 상대를 인정하고, 하지만 나는 너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중요시한다. “내가 이만큼 너보다 낫다.” 이 개념은 열정으로 새로운 정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낸다.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 관계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우위를 가질 수 있다. 짐 고든이란 경찰청장은 ‘국가인’이지만, 배트맨과의 공조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낸다. 그러나 이것은 선의의 경쟁과는 또 다른 게 그러한 창조적 선의의 관계를 방해하고 부정하려는 장치들에 굴복하거나 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생산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배트맨을 더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그와 반작용하는 매력적인 악당 때문일 것이다. 스케어크로우/닥터크레인, 조커, 베인등 악당들은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보이고 있는데, 대사에서도 닥터크레인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두고 배트맨은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소개한다. 조커는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길 원하다가 나중에는 밝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연속을 계속하고, 사도-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증으로 그들은 맞으면서 고통받을수록, 또 배트맨이 고민에 빠질수록 오히려 호쾌하게 웃으면서 즐거워하는데, 고통에서 고함으로, 고함에서 미소로, 조커는 내면의 슬픔과 아픔과 동시에 얼굴에는 찢어진 입을 갖고 있음으로써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잭 니콜슨이 분한 조커는 “너희들이 나의 아픔을 알고 있다면 날 이해하게 될 거야”와 같은 말을 통해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기관없는신체로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의미들을 이접시킨다. 인간의 내면에 악함과 선함이 공존하기 때문에 단순한 이분법적 배치와 구조주의들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조커 역을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을 캐스팅 물망에 올려놓고 저울질했다고 한다. 처음 히스레저는 다크나이트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배트맨 비긴즈를 보고 마음이 돌연 바뀌어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놀란 감독은 히스 레저에게 조커에 대해 이것저것 주문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그가 원했던 것은 프란시스베이컨의 그림들을 참조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히스레저는 그 누구의 지시도 없이 혼자 조커의 분장을 하고 조커의 행동을 연구하고 그저 아무런 지시도 없이 천재적으로 연기를 펼치게 된다. ‘사람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 더 해괴해지지’라는 대사를 남기며 마치 웃고 있지만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듯한 연기를 보여준 것은, 이런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적 수퍼히어로물에서는 단순히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 권선징악적인 면을 부각한다면 배트맨에서 나타나는 것은 악인과 선인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두고 고민하던 배트맨은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으로 하비덴트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마저 사랑하는 이를 잃은 복수심으로 무자비한 투페이스로 변해버린다. 동전 던지기를 통해 운명을 조롱하는 투페이스는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의문을 던진다. 다르게 보자면 편집증적 기계인 배트맨은 정신분열증적 기계인 악인들과 끊임없이 대립한다. 배트맨은 무고한 죽음을 막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죄의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범죄 없는 도시 고담을 만들기 위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데, 그 욕망하는 기계인 배트맨은 편집증에 걸린 기계가 된 것이다.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데, 하나는 기관들의 유기적 결합을 말하는 유기체이고, 다른 하나는 구멍으로서의 순수생성이다. 들뢰즈는 모든 기관은 기관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멍으로써 존재한다고 보았다. 기관없는 신체인 악인들은 욕망하는 생산인 배트맨의 행위에 포개어져서 그것을 끌어당기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조커는 오히려 배트맨의 가면을 벗기고 싶지 않아 하면서, 너와 나는 사실 동일하다고 말한다. 나는 네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너도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고통과 고함, 얼굴 없는 머리의 성분을 자극하며 태생은 같음을, 그러나 갈등을 하면서 서로 존재 이유를 찾는 것으로 주장한다. 브루스웨인과 배트맨으로서 평화로운 고담시를 주창하는 그는 영원히 악인으로 남길 바라며 하비덴트를 오히려 선의 상징으로 만들며 홀연히 사라진다. 본질과 외관, 이데아와 그림자,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시뮬라르크를 구분한 플라톤의 논의에서 시뮬라르크를 자연발생적인 사건효과를 억제하는 논리로 사용하였는데, 좋은 복사물로서 선의의 상징인 하비덴트를 만듦으로써, 승리를 확보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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