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5. 20:44ㆍ이슈
사전 예약만 50만명 이상, 기대감을 가지고
집 앞 CGV에서 봤는데, 사람이 일단 너무 많고 예약도 꽉 차 있어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영화를 아이맥스로 볼 수가 없었다. 화면은 그렇다 쳐도 사운드가 너무 아쉬웠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점은 덩케르크나 인터스텔라 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는 스펙타클함이 없었다. 앞으로 볼 생각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은 아무래도 전기 영화다 보니 사전에 역사를 알고 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점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읽으면 제일 좋고, 시간이 없다면 유튜브에서 이동진 평론가나 김상욱 교수가 알려주는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미리 알고 가면 좋다. 과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오펜하이머의 심리, 미국의 정치적 이슈, 세계정세의 흐름 같은 배경지식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폭탄이 터지는 화려한 장면보다는 인물들의 대사, 감정, 정치적 상황에 더 집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테넷처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초의 전기적 성격을 띠는 영화다.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인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이었다. 영화 길이가 자그마치 180분이나 되며 한국 개봉일은 23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진 테넷, 인터스텔라의 감독이며, 개인적으로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매우 좋아해서 20번 이상 봤는데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의 감독이기도 하다. 그는 알쓸별잡에 전격 출연해 인터뷰했으며, 여러 가지 힌트를 남겼다. 기존의 태넷과 인터스텔라에서 물리학에 대해 공부를 꽤 많이 했으며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킵 손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킵 손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블랙홀 외부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표현했고, 내부의 모습과 태서랙트의 모습이 어떨지에 대한 시각적인 표현도 훌륭했다. 이번 오펜하이머에서도 양자역학에 대한 시각적인 표현도 마음에 들었다.
오펜하이머가 주목받은 이유
오펜하이머는 독일계 미국인이면서 유대인이었다. 그렇지만 세속화된 생활 양식을 유지하고 집안이 또 유복했다. 물질적으로 모자람 없이 자란 그는, 하버드 대에서 화학을 전공하다가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당시 물리학계는 유럽 중에서도, 이론물리학의 괴팅겐 대학교와 실험물리학의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가 수학하던 1920년대는 양자물리학이 떠오르던 시기였는데, 하이젠베르크 같은 내로라하는 물리학자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쌓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지도교수의 신임을 얻지 못하자 그가 먹는 사과에 독을 바르는 기행을 저지른다. 이게 아마 그의 독특한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된다. 또 이후에 미국에 돌아와서도 데이트 중인 여인을 두고 혼자 집에 와서, 실종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집에서 오펜하이머를 발견하는 일도 생겨서 결국 신문에서 다룰 정도가 된다. 그런 그는 유럽에서 돌아와 칼텍과 UC버클리에서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수행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나치독일과 미국은 핵무기 개발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태동하는 당시 신기술을 나라와 언어를 넘어 장벽 없이 공부하고 있다가, 이후 39년 독일에서 핵분열이 발견되자, 물리학자들은 국적으로 나뉘어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때 유럽의 두 첨단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온 오펜하이머가 운명처럼 미국 정부의 신임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영화의 시작은 트리니티 실험부터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은 후 원자폭탄을 드디어 실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영화가 급속도로 흘러간다. 물리학을 잘 모르지만, 감히 설명하자면, 원자폭탄의 원리가 핵분열 반응에 나오는 파괴적인 에너지 증가를 이용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실제 개발할 당시에 이 핵분열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지구의 대기를 모두 파괴할 것이란 두려움이 아주 컸다고 한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도 실험 결과에 대해 놀라게 된다. 이후에 그는 핵 사용에 대한 통제권은 정치권으로 넘어가게 되지만, 이때부터 계속해서 그가 인류에게 스스로 파멸할 수 있는 재앙을 개발해 낸 것이 아닌가 괴로워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핵 개발 이후에 2차세계대전은 종결을 맞고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오펜하이머가 공산당 스파이로 의심받는 단계로 진행된다. 이때부터 주요 인물은 오펜하이머와 루이스 스트로스가 된다. 오펜하이머 시점에서 바라본 장면은 컬러 필름으로, 그리고 루이스 스트로스의 시점에서는 흑백 필름을 사용했다. 첨언하자면 놀란 감독은 아이맥스 회사에서 특수 흑백 필름을 쓸 수 있는 전용 카메라까지 지원받아서 아예 원본까지 흑백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사실 개발 하는 중이던 50년대는 세계적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루즈벨트 당시 대통령이 사망하게 되고, 핵무기 개발 경쟁하던 나치 독일이 이미 패망하며 히틀러는 자살을 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 상황에서 핵폭탄을 계속 개발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강대국 패권이 변화하게 된다.
결국 국민의 영웅에서 정치권의 희생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안심하나 싶었지만, 공산주의 소련이 급부상하게 되고, 미국은 이후에 극심한 혼란을 겪으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전 세계를 집어삼킬까 봐 두려워한다. 제 1강대국은 그 체급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가상적국이라도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데 당시의 소련은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규모가 상당해서, 전후 경제가 망가진 유럽 국가들을 마샬플랜으로 지원한다. 그리고 독일과 일본이 전범국가임에도 동맹으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 원조를 한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농경 국가로 되돌릴 생각을 갖고 있을 정도였지만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미국 사회를 덮쳤는지 알 수 있다. (이후에 50년대에는 미국에 매카시즘이 유행한다. 이른바 좌파 색출하는 그 매카시즘 말이다.)
오펜하이머는 젊은 시절 사실 물리학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나 정치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그의 전 연인을 비롯해 그의 주변 인물 상당수가 좌파 인물들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3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등을 이유로 공산당원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친구, 연인, 선생님, 이웃 중에도 좌파 인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어울리며 사교활동을 하면 좌파적인 사상을 얘기하고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대학 교원 노조에 참가하였고 스페인 내전에 후원하였기 때문에, 훗날 오펜하이머가 스트로스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타깃이 된다.
취조 장면은 정말 객관적이면서 사실적으로 나오는데, 그가 몇 번이고 공산당원임을 부정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는 천재적인 과학자이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이면서 사람의 심리를 읽거나 상대하는 일에는 어려워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스트로스 역시 그의 정치적인 야망 때문에 국민 영웅이었던 오펜하이머를 끌어내리지만 결국 그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서 매몰되는 결과를 맞는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원래 깡마르고 안 그래도 정신 병력도 있었지만, 말년에는 스스로 내가 이 세상에 파괴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
요약하자면, 천재성과 애국심으로 미국인에게 핵폭탄을 만들어 승리를 가져다주고 인류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져다주었지만, 과거 경력 때문에 말년에 정치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의 전기 이름이 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인지 이해가 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끈 프로젝트로 인해 인류에게 끔찍한 결말이 다가오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왜 미국 정치권은 핵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국민 영웅을 가열차게 몰아쳤는지에 대한 과정이 가감 없고 객관적으로, 마지막으로 중요한 오펜하이머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느낀 점
영화는 CG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핵폭발 장면마저 특수 폭약을 사용해서 직접 촬영했다. 킬리언 머피,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에밀리 블런트 모두 연기를 엄청나게 잘한다. 배우의 얼굴이지만 실존 인물 그대로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로 배우들은 본인의 출연료를 삭감해서 출연했다고 할 정도로 놀란 감독에게 애정을 드러냈다. 3시간의 영화는 지루해지기 쉬운데 막상 영화를 보고 있을 때는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이번 영화에서 다루는 굵직한 사건들은 우리나라도 거의 당사자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흔히들 말하는 일본이 핵 맞는데 좋아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나는 좋아한다고 답하고 싶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에게 죄송하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어쩔 수 없다고 답하고 싶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일본이 1억 총옥쇄를 포기하고 순순히 항복했다면? 일본이 구차한 항복조건 중에서 나머지를 전부 제외하고 한국만은 식민지로 인정해달라고 가정하고, 그걸 세계열강들이 인정해 줬다면? 만약 미국이 개발만 성공해 놓고 소련이 먼저 발사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무슨 가정을 하더라도 한국이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영화는 주제가 핵탄두인데 왜 시원한 감정이 들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이야기의 초점이 핵 개발을 해낸 천재 지휘자의 양가적인 감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해 내야 하는 책임감과 나라를 위한 애국심, 그의 업적에 비례하는 죄책감, 정치권의 음모 술수 등 많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묘사하였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려내고 그와 관련된 이슈들을 짚어보면서 관객에게 이 상황에서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냐고 묻는 듯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주연 및 조연에 여성 과학자들의 완벽한 부재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수 많은 남성을 전쟁터로 끌고 갔고, 그 여파로 사회 곳곳에 여성들의 진출을 끌어낸 시기다. 그리고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도 알려진 여성 과학자, 여성 의사, 여성 기술자들이 제 몫을 해냈다. 근데 이야기의 초점에 방해가 되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놀란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와 같은 느낌을 관객에게 선사 해주고 싶어서 과학자를 찾아가고 거액의 촬영비를 한 장면에 쏟아붓는다. 이상하리만치 아이맥스 실물 필름으로 찍거나, 실물 세트장에서 비행기를 터트리거나, CG 처리를 하지 않고 거친 날씨와 척박한 땅을 찾아가는 그 집착 때문이다. 굳이 내가 다크나이트 트릴로지를 20번 넘게 봐서가 아니다. 참고로 오펜하이머에는 쿠키 영상이 없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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